AI 반도체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한동안 시선은 온통 HBM에 머물렀습니다. GPU가 아무리 빠르게 계산해도 데이터를 제때 공급하지 못하면 성능을 제대로 낼 수 없으니, HBM이 AI 시대의 핵심 메모리로 떠오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저 역시 AI와 메모리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HBM부터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최근 낸드플래시 시장을 들여다보면 조금 다른 풍경이 나타납니다. 스마트폰이나 PC가 갑자기 엄청나게 팔리기 시작한 것도 아닌데 낸드 수요가 강해지고, 기업용 SSD가 AI 인프라의 중요한 부품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깁니다. AI는 계산하는 기술인데 왜 저장장치까지 바꾸고 있는 걸까요?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AI 산업을 GPU와 HBM만으로 바라봐서는 전체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AI는 엄청난 연산능력을 필요로 하는 동시에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만들어내고, 읽고, 저장하고, 다시 불러오는 산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한동안 HBM의 화려한 성장에 가려져 있던 낸드가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HBM과 낸드는 하는 일이 다릅니다
HBM과 낸드는 모두 메모리 반도체지만 역할은 상당히 다릅니다. HBM은 GPU가 계산하는 동안 필요한 데이터를 매우 빠른 속도로 전달하는 작업 공간에 가깝습니다. 반면 낸드는 전원을 꺼도 데이터가 사라지지 않는 비휘발성 메모리로,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과 SSD 등에 데이터를 저장하는 역할을 합니다. 쉽게 말하면 HBM이 책상 위에 펼쳐놓고 당장 사용하는 자료라면, 낸드 기반 SSD는 필요할 때 꺼내 쓰기 위해 자료를 보관해두는 서류함에 가깝습니다.
그동안 AI 반도체 시장에서는 이 ‘책상’의 크기와 속도가 워낙 중요했습니다. GPU 성능이 급격히 높아지면서 데이터를 얼마나 빨리 공급하느냐가 병목이 됐고, 그래서 HBM이 시장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하지만 AI 서비스가 실제 산업으로 확대되면서 상황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학습 데이터, 모델 데이터, 이미지와 영상, 기업 내부 자료, 그리고 AI가 생성하는 새로운 데이터까지 계속 쌓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계산을 아무리 빨리해도 이 데이터를 저장하고 다시 빠르게 불러올 공간이 부족하면 시스템 전체의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AI가 커질수록 저장해야 할 데이터도 함께 늘어납니다
생성형 AI 초창기에는 시장의 관심이 ‘얼마나 빠르게 학습할 수 있는가’에 집중됐습니다. 하지만 AI가 실제 서비스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수많은 사용자가 AI에 질문하고, 기업은 내부 데이터를 연결하고, AI 에이전트는 여러 작업을 반복해서 수행합니다. 텍스트뿐 아니라 이미지·영상·음성처럼 용량이 큰 데이터도 계속 증가합니다. AI가 발전할수록 계산해야 할 데이터뿐 아니라 보관하고 다시 불러와야 할 데이터의 양도 함께 커지는 구조인 것입니다.
실제로 2026년 낸드 시장에서는 이런 변화가 숫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TrendForce에 따르면 2026년 1분기 세계 5대 낸드 업체의 매출은 전 분기보다 83.7% 증가해 389억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주요 원인으로 AI 서버 인프라 구축에 필요한 고속·대용량 기업용 SSD 수요 증가가 지목됐습니다. 특히 고용량 QLC 기업용 SSD가 데이터센터 저장장치로 빠르게 확대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과 PC 수요가 강해서 만들어진 전통적인 낸드 호황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HDD가 있는데 굳이 비싼 SSD를 써야 할까?
여기에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데이터만 많이 저장하면 된다면 기존 HDD를 계속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요? 실제로 HDD는 대용량 데이터를 저렴하게 보관하는 데 여전히 강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AI 데이터센터에서는 저장용량만큼 데이터 접근 속도와 전력효율, 설치 공간도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대용량 HDD 공급 부족까지 겹치면서 일부 저장 수요가 SSD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TrendForce는 2026년 AI 서버 저장 수요 증가와 HDD 공급 부족이 맞물리면서 고용량 QLC 기업용 SSD 수요가 강해지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SSD 업체들이 만드는 제품도 이를 보여줍니다. 마이크론은 올해 5월 245TB 기업용 SSD 출하를 시작했습니다. 회사 측에 따르면 같은 원시 저장용량을 HDD 기반 시스템으로 구성했을 때와 비교해 필요한 랙 수를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삼성전자도 7월 PCIe 6.0 기반 기업용 SSD PM1763 양산을 시작하면서 AI 학습과 추론에서 데이터량이 급증함에 따라 데이터를 빠르고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기업용 SSD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저장장치 경쟁이 단순히 ‘몇 TB를 저장하느냐’에서 얼마나 많은 데이터를 좁은 공간에서 빠르고 효율적으로 처리하느냐의 경쟁으로 옮겨가고 있는 셈입니다.
낸드 시장의 주인공도 스마트폰에서 데이터센터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예전 낸드 시장을 볼 때 중요한 지표는 스마트폰과 PC 판매량이었습니다. 스마트폰 저장용량이 커지고 PC에 SSD가 보급되면서 낸드 수요가 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비경기가 나빠지고 스마트폰과 PC 판매가 줄어들면 낸드 업황도 함께 흔들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소비자 시장이 아주 강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기업용 SSD가 수요를 받쳐주는 새로운 구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TrendForce는 2026년 기업용 SSD가 낸드플래시의 가장 큰 응용처로 올라설 것으로 전망했고, 최근 조사에서도 주요 공급업체들이 생산 자원을 서버 저장장치 쪽에 우선 배분하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2026년 낸드 시장이 공급 부족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배경에도 AI 관련 수요 증가와 제한적인 생산능력 확대가 함께 자리 잡고 있습니다. 결국 낸드 시장을 볼 때도 이제 스마트폰 출하량만 확인해서는 부족합니다. AI 데이터센터 투자 → 서버 증가 → 기업용 SSD 증가 → 낸드 수요 증가라는 새로운 길이 하나 더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는 어떤 의미일까?
이 변화가 흥미로운 이유는 한국 메모리 기업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AI 메모리 경쟁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HBM 점유율부터 떠올리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낸드 사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SK하이닉스 그룹에는 기업용 SSD 사업을 하는 솔리다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TrendForce 집계에서 2026년 1분기 삼성전자는 낸드 매출 135억1천만 달러로 31.6%의 점유율을 기록했고, SK하이닉스와 솔리다임을 합친 SK그룹은 약 75억3천만 달러로 17.6%를 차지했습니다. 솔리다임의 고용량 QLC 기업용 SSD 주문 증가도 그룹 실적에 힘을 보탰습니다.
다만 여기서 ‘AI가 뜨니 낸드는 무조건 좋다’고 단순하게 결론 내리면 곤란합니다. 낸드는 오랫동안 공급 증가와 가격 하락을 반복해온 산업이고, 기업용 SSD 수요가 강하더라도 생산업체들이 공급을 얼마나 늘리느냐에 따라 가격과 수익성은 다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TrendForce는 현재의 공급 부족이 2026년에는 이어지겠지만 공정 전환에 따른 생산량 증가 등으로 2027년 하반기에는 수급이 점차 완화될 가능성을 전망하고 있습니다. 결국 투자자가 봐야 할 것은 단순한 낸드 출하량이 아니라 기업용 SSD 비중, 낸드 가격, 공급업체의 증설 속도와 AI 데이터센터 투자 흐름입니다.
AI 반도체 경쟁은 이제 ‘계산’만의 경쟁이 아닙니다
AI 산업을 하나의 거대한 사무실이라고 생각하면 구조가 조금 선명해집니다. GPU는 일을 아주 빠르게 처리하는 직원이고, HBM은 직원이 바로 손을 뻗어 사용하는 넓은 책상입니다. 그런데 회사가 커지고 처리해야 할 업무가 폭증하면 책상만 넓힌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자료를 쌓아두고 필요할 때 빠르게 찾아올 수 있는 거대한 자료실도 함께 필요합니다. 그 자료실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낸드 기반의 SSD입니다.
그래서 최근 낸드의 변화는 단순한 메모리 가격 반등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AI가 발전하면서 반도체 산업의 병목이 GPU에서 HBM으로, 다시 첨단 패키징과 저장장치로 넓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AI 반도체 뉴스를 볼 때는 “GPU가 얼마나 팔렸나?”만 볼 것이 아니라 그 GPU가 만들어내고 사용하는 방대한 데이터를 어디에 저장하고 얼마나 빠르게 다시 꺼낼 것인가도 함께 볼 필요가 있습니다. AI 시대가 바꾸고 있는 것은 계산하는 칩만이 아닙니다. 그 계산을 뒷받침하는 저장장치까지 함께 바뀌고 있습니다.
자주 하는 질문
Q1. 낸드플래시와 SSD는 같은 것인가요?
같은 것은 아닙니다. 낸드플래시는 데이터를 저장하는 반도체 메모리이고, SSD는 낸드플래시와 컨트롤러 등을 결합해 만든 저장장치입니다. 쉽게 말하면 낸드가 핵심 재료라면 SSD는 그 재료로 만든 완제품에 가깝습니다.
Q2. AI 서버에는 왜 기업용 SSD가 필요한가요?
AI 학습과 추론 과정에서는 많은 데이터를 반복적으로 읽고 저장해야 합니다. 기업용 SSD는 대용량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면서 서버 환경에서 요구되는 성능과 안정성을 제공하기 때문에 AI 데이터센터에서 중요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Q3. QLC SSD란 무엇인가요?
QLC는 하나의 낸드 셀에 4비트의 데이터를 저장하는 방식입니다. 같은 공간에 더 많은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어 대용량 SSD를 만드는 데 유리합니다. 최근 AI 데이터센터에서는 고용량 QLC 기업용 SSD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Q4. AI 수요가 늘면 낸드 가격은 계속 오를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현재는 AI 서버용 기업용 SSD 수요와 제한적인 공급으로 수급이 타이트하지만, 낸드는 공급량 변화에 민감한 산업입니다. 공정 전환과 생산량 증가가 이어지면 수급이 다시 완화될 수 있으며, TrendForce는 현재 공급 부족이 2027년 하반기부터 점차 완화될 가능성을 전망하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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